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순왕후(조선 영조)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||[youtube(GM9OerWUw1Q)]|| [[1757년]](영조 33년), [[왕비|정비]]인 [[정성왕후]](貞聖王后)가 [[죽음|승하]]하자 [[영조]]는 부왕 [[숙종(조선)|숙종]]의 유지[* '''그전까지는 [[왕비|중전]]이 죽으면 기존에 있던 [[후궁]]들 중에서 새로운 [[왕비]]를 간택하는게''' 원래 보통 관례였으나 [[숙종(조선)|숙종]]은 [[장희빈]]의 [[인현왕후|중전]] [[저주]] 사건과 [[사약|사사]] 이후에 [[후궁]]이 [[왕비]]가 돼서 궁중에 암투가 벌어지는게 진절머리가 났는지 아예 법적으로 막고, 후대에게도 반드시 [[간택]]으로만 [[왕비]]를 뽑으라고 지시한 것이다.]에 따라 [[후궁]]들 중에서 새 [[왕비]](王妃)를 책봉하지 않았다. 그러다 [[1759년]](영조 35년) [[6월 9일]], 정식 [[왕비|중전]][[간택]]을 통해 유학 김한구의 딸을 새 [[왕비]]로 간택하였다. >'''삼간택을 행하여 유학 김한구의 딸을 정하고 대혼을 6월 22일 오시로 잡다''' >---- >삼간택(三揀擇)을 행하여 유학(幼學) '''김한구(金漢耉)'''의 딸로 정하고, 하교하기를, >>"'''김한구'''의 따님으로 정하였는데 첨의(僉議)는 어떠한가?" >하니, 영의정 '''김상로(金尙魯)'''·좌의정 '''신만(申晩)'''·우의정 이후(李) 및 예조(禮曹)의 세 당상이 빈청(賓廳)에 모여서 아뢰기를, >>"신 등이 삼가 성교(聖敎)를 받들으니 진실로 신인(神人)의 소망(所望)에 합당합니다. >>이는 실로 온 나라 신민(臣民)의 복이니, 흔변(欣忭)의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." >하였다. 대혼(大婚)을 6월 22일 오시(午時)로써 택길(擇吉)하고 이날 정사를 열어 '''김한구'''를 돈녕 도정(敦寧都正)으로 삼았으니, >왕비(王妃)의 아버지에 대하여 전례(前例)대로 제수한 것이다. '''김시찬(金時粲)'''을 부제학(副提學)으로, >안집(安)과 '''유한소(兪漢蕭)'''를 분승지(分承旨)로 삼았다. >----- >- '''《[[영조실록]]》 93권, 영조 35년([[1759년]], 청 건륭(乾隆) 24년) 6월 9일 (무오) 1번째기사''' 즉 '''15세의 어린 나이로 51세 연상인 66세의 [[영조]]와 [[6월 22일]]에 [[창경궁 명정전]]에서 [[결혼|가례]]를 치루고''' [[왕비]]로 정식 책봉되었다. 의붓아들인 [[사도세자]]·[[혜경궁 홍씨]](둘다 [[1735년]]생)보다도 10살이나 어리며, [[정조(조선)|정조]](1752년 생)의 계조모지만 실제 두 사람의 나이는 겨우 '''7살 차이''' 밖에 나지 않았다. 심지어 [[결혼]]할 당시에는 정순왕후의 할아버지인 김선경도 생존해 있었는데, [[1699년]](숙종 25년)생으로 [[영조]]가 5살 더 많았다. [[조선]]의 역대 [[왕비]]들 중에 가장 [[조선/왕사|국왕]]과의 나이 차가 큰 관계이다. >'''명정전에서 왕비를 책봉하는 예를 거행하다''' >---- >[[영조|임금]]이 원류관(遠遊冠)과 강사포(絳紗袍)를 갖추고 '''[[창경궁 명정전|명정전]](明政殿)'''에 친림하여 >비(妃)를 책봉하는 예(禮)를 거행하였는데, 정사(正使)와 부사(副使)가 >비를 책봉한 뒤에 복명(復命)하였다. >---- >- '''《[[영조실록]]》 93권, 영조 35년([[1759년]], 청 건륭(乾隆) 24년) 6월 20일 (기사) 1번째기사''' 정순왕후와 [[영조]]의 [[결혼|가례]] 절차, 가례식을 다룬 기록이 《영조 정순후 가례도감 의궤》인데 총 2권으로 [[2011년]] [[외규장각]] 문서 반환 당시 포함된 의궤기도 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